전작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에 크게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속작을 읽어보는 것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기대치가 낮아서 그런지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만, '플리커 스타일'을 생각하면 많이 아쉽습니다. 가장 좋은 부분을 각각 놓고 비교할 때는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 쪽이 단연 앞서지만, 가장 나쁜 부분을 비교할 때는 수몰 피아노 쪽이 앞서는 것 같습니다.
일단 저는 이 책이 카가미가(家) 사가(SAGA)라고 인정하지 못하겠습니다. 카가미 소지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카카미가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미친 놈들이 잔뜩 등장하기는 하지만, 카가미가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뭐, 사실 이야기만 재미있다면 이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겠습니다만.
앞쪽은 이건 싸이코 드라마이지 미스터리가 아니라는 느낌이었는데,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이게 미스터리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미스터리 소설에서 나오는 죽음은 그게 아무리 사건으로 보이지 않거나, 완결된 것으로 보이는 사건이라도 무언가의 미스터리라는 것을 잊고 방심할 때 쯤 이게 미스터리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한방 먹었다는 느낌은 기분 좋지만, 미스터리임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동안 긴장이 떨어지는 점은 아쉬울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복수의 화자가 각각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퍼즐의 조각을 제시하고 독자에게 조립을 요구하는 것은 미스터리에서 그렇게 드문 수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의 상관관계를 풀어내는 것이 일반적이 키포인트인데, 여기서는 각각의 이야기들의 시간축을 짐작하기가 어려워서 더욱 알기 힘들었습니다. 시간축을 오인하게 하기 위한 트릭에 저는 멋지게 빠져버려서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밝혀지고 나서 인물들간의 상관관계를 납득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일본어에서의 한자 음독에 의한 트릭에 관련된지라 일본어를 읽을 수 있는 저는 약간의 검색을 통해서 밝혀냈습니다만, 대부분의 한국 독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갈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은 번역에서 커버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어차피 밝혀지고 난 다음이니 그냥 역자가 해설을 넣어주었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작중에서 이 차이가 크게 의미를 가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등장하는 것은 피아노가 아니고 키보드였습니다. 수몰 키보드라고 하면 확실히 아무런 낭만이 없어 보이기는 합니다.
이제 카가미가 사가는 한권 남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마지막권은 플리커 스타일만큼은 아니라도 두번째, 세번째 이야기보다는 훌륭하기를 기원해봅니다. 그렇다고 이미 쓰여진 소설의 퀄리티가 바뀌지는 않겠지만요.